여행/2012 동유럽2012. 7. 19. 12:24

 

 

Sigmund Freud (1856 ~ 1939)

 

 

프로이트를 내가 처음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책꽂이에 <꿈의 해석>이 꽂혀 있었다. 나도 당시 비슷한 책(?)을 갖고 있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둘 다 이 유명한 고전을 사 놓고만 있고 안 읽은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책을 교환해서 읽기로 했다.

 

 

그 다음에 프로이트를 만난 건 대학교 때였다. 예술학개론, 예술학사 시간에 각각 프로이트와 융의 책을 읽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 땐 정말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안난다. 그 때 그렇게 교수님이 설명해 주시고, 원전을 읽고, 해설서와 논문까지 읽어가면 발제를 하고도 지금 전혀 모르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놀기 위해 여행을 가서 프로이트를 만나고, 또 프로이트를 즐겁게 만나기 위해 사전에 공부를 좀 하면서 이제는 프로이트에 대한 윤곽이 아주 조금은 잡혔다. 역시 뭐든 주도적으로 하고, 또 재미있게 하면 지식이든 경험이든 확실한 내 것이 되는 것인가보다. 최근에 내가 과외 아이들에게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이라면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열토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이 여행 계획을 짜고 직접 세계를 여행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생각하고, 그 분야가 발달한 도시를 탐험하며, 거기서 느낀 점을 프리젠테이션 하는 방법이다. 나도 헛소리였고, 과외 아이들도 헛소리로 들었겠지만 언젠가 이 프로그램이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다듬어져 학생들에게도 이런 앎의 재미, 탐험의 재미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음악과 건축의 도시 빈.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프로이트 박물관이었다. 그닥 유명한 곳도 아니어서 트램이나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있는 곳도 아니고,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평범한 곳에 있다. 프로이트가 다녔던 빈 대학 근처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었는데, 1시간을 넘게 빙빙 돌아서 겨우 찾아냈다. 비교적 큰 골목에 있었지만 그래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프로이트 박물관은 카페보다도 작은 크기의 입구에, 언뜻 지나치기 쉬운 간판을 달고 있었다. 옆으로 세워진 'FREUD'라는 간판을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르크 가세 19번지, 빈, 오스트리아.

프로이트가 1891년부터 1938년까지 47년간 살며 세 자녀를 낳은 곳이다. 또한 여기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고,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 집이 현재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장소다.




진료실 입구.



진료실 침대. 이후 이 침대는 정신분석학의 심볼이 되었다고 한다.





환자 대기실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

 



박물관 내에서 보인 바깥 풍경




The teaching staff of the Gymnasium about 1870. Freud가 졸업한 김나지움의 교사들의 사진.

이런 프로이트 개인 생애에 대한 잡다한 사진들이 모두 걸려 있다. 







Prof. Ernst Wilhelm Ritter von Brücke (에른스트 브뤼케 교수)

프로이트가 빈 대학 의학부 졸업 직후 몸담았던 생리학연구소를 경영하던 에른스트 브뤼케 교수.

프로이트를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이트는 생리학연구소를 거쳐 종합병원 임상 조수로 자리를 옮겨 신경질환을 연구했다. 당시 신경질환은 빈에서 낯선 영역이었다. 프로이트는 빈 역사상 처음으로 사체부검을 했고, '급성다발신경염'을 진단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프로이트는 1885년 발표한 임상 논문을 인정받아 신경병리학 분야의 강사 자리를 얻었다. 이 신경병리학적 연구는 훗날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해 오늘날 프로이트를 존재하게 했다.





Sketch plan of Freud's study-bedroom in the third courtyard of the General Hospital.

이런 잡다한 것들을 전시해 두어서 신기하긴 했지만 사실 별로 감흥은 없었다

 





청년 프로이트



중년 프로이트



말년 프로이트




 

뮤지엄 입구 벽면

 

 

We have been led to distinguish two kinds of drives : those which seek to lead what is living to death, and others, the sexual drives, which are perpetually attempting and achieving a renewal of life.

 

우리가 그동안 구분짓도록 강요된 두 가지 충동 :  죽음 충동과, 삶의 갱신을 성취하고 시도하는 성적 충동.

잘 모르는 대목이니 해석은 달지 않겠다. ㅋㅋ

 

 




내가 읽은 프로이트에 대한 부분과 박물관에서 본 것들을 일치시키는 게 힘들었다. 어떻게든 연결해보려 노력했는데, 프로이트에 그렇게까지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새로 읽자니 자신도 없어서 그냥 읽은 것 중 재밌는 부분을 꺼내 써 본다. ㅎㅎ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흥미로운 해석

 

 

"종교는 유아기적인 신경증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이 선언 덕분에 많은 종교인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대부분 성(姓)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인간 머릿 속엔 온통 성에 관한 생각 뿐이고, 종교는 집단 환상을 공유하는, 강박관념과 신경증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도 길게 쓰고 싶지만 필력이 딸려서 못 쓰겠다. 내가 읽은 것을 간단히 말하면 종교적 의례나 도덕률은 신성한 의도가 아닌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제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라는 건데, 그것이 신경증 환자의 증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성적이고 고상한 현대 지식인들, 특히 종교를 가진 지식인들에게 외면 받기 좋았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프로이트가 성 만큼이나 줄기차게 관심을 두었던 또다른 분야가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주로 정신분석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생애 맨 마지막 순간에 출판한 책은 <모세와 유일신론 Moses and Monotheism>(1937)였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기독교에 대해 신학적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에게는 종교도 인간 심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관심을 갖게 된, 그의 연구를 위한 하나의 재료였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전쟁을 겪으며 유대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던 중, 유대민족의 숙명에 대해 고민하다가 모세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대인 프로이트가 생각한, '왜 유대인이 유럽인에게 끊임없이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에 대한 답은 이것이었다.

 

 "유대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중 모세에게 인도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십계명을 전수한 모세를 거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사람들에게  계속 유전되고 있어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원죄의식에 눈뜨게 된다. 이 원죄는 하나니므이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바울은 희생을 통해 원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말씀을 만들었다. 이 원죄를 인정한 사람은 그리스도 교도가 되었지만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유대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그리스도 교인들로부터 왜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지를 질책당하고 갖은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숙명과 트라우마라는 개념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앞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다. 이런 개념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걸쳐 계속 되새김질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유대인으로 살면서 자신이 어린 시절 겪고 목격했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상처를 입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와 길을 가는데 지나가던 기독교인들과 반대편에서 마주친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민족을 지독히 무시했다. 그 기독교인들은 "길 아래로 내려가라"며 프로이트의 아버지를 밀쳤고, 아버지는 도로로 밀쳐졌고, 그 때 쓰고 있던 모자가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아버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나뒹군 모자를 다시 주워 머리에 썼다. 그 모습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프로이트에게 기독교는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일화를 알고 나면, 모든 인간에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프로이트 눈에는 그저 개인의 내면에서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도 일면 이해가 간다. 만일 그가 반유대인 정서가 팽배한 시절의 빈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이론을 연구할 계기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완전히 몰락한 패배의 도시 빈에서, 또 그 속에서도 핍박받는 민족으로 살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종교나 신이라는 절대선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신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개인이 만들어낸 표상(representation)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 아닐까. 보통 기독교에선 신이 인간을 만들지만,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삶의 사건들을 표상하며 만들어 낸 사실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해석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인간은 종교적 삶을 시작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가지고, 그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의 시작이 인류로 하여금 종교라는 것을 만들게 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삶의 태동기인 유아기 때부터 시작되는 표상의 과정이 그가 훗날 신을 표상하는 과정에 있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핍박받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유하고 온건하게 잘 자랐던 자신의 또래인 기독교 친구들의 삶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신'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표상을 건강하게 만들 만한 가정환경이나 문화적 환경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프로이트는 신과 종교와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관심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보다, '어떻게 하느님이 한 개인에게 사랑의 화신으로 표상되는가' 에 더 초점이 맞춰지면서,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핍박받은 유대인이 빈에 남기고 간 유산

 

 

<모세와 유일신론>에서 프로이트는 반유대주의의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번째는 앞서 언급했듯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유대인이 그들이 사는 곳의 주민들과는 다른 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렇다.

 "유대인들은 어떤 억압을 받든 억압에 저항한다. 가장 잔혹한 박해마저도 그들을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실제 삶에서 자신의 것을 지켜내는 능력을 보여주며, 그들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문명에 귀중한 기여를 한다."

반유대주의의 근거라고 든 것이지만, 거꾸로 유대인을 더이상 핍박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리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지역을 빛낸 위대한 이방인인 유대인을 많이 만났다.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도시에 섞이지 못하고 늘 이방인과 경계인으로 어느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살았던 유대인.

그들이 이룬 문명과 문화의 흔적들로 외려 그 도시들이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 수 백만 관광객이 그 도시로 모여 든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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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개꾸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