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2012 동유럽2012. 7. 17. 08:00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르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막 스무살을 넘긴 청년 카프카가 독서에 대해 쓴 글이다.

 

 

프란츠 카프카.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 3대 작가로 꼽힌다. 소설가 중 작품이 가장 많이 연극무대에 올려지는 작가이다. 카프카의 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에 속한다. 카프카의 소설은 대부분 영화화되었고, 전기영화까지 두 편이나 나왔다. 예술가를 소재로 한 시집이 나온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고국에서 자유롭게 읽히기까지

이렇게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카프카의 작품은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쓰였다. 이 작품이 정작 체코어로 번역되어 체코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은 1957년에 이르러서였다. 체콩인이 자기 나라의 작가를 접하게 된 것이 한국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1957년, 카프카의 작품이 체코어로 번역됐다고 해서 이것이 곧 체코 사람들이 카프카를 읽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카프카가 프라하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은 파란만장한 체코 현대사와 고스란히 겹쳐진다. 공산정권이 카프카를 불온한 작가로 판정해 그의 작품을 금서로 분류한 것이다. 체코인은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카프카를 읽을 수 없었다.

이후 서방 지식인들이 체코 정부에 카프카 작품에 자유를 주라는 압력을 넣자 공산정권이 카프카에 대한 해석을 달리했다. 원래 '퇴폐적 허무주의자'였던 카프카는 '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혁명적 비판자'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1965년에 공산정권은 카프카 생가의 외벽에 카프카의 얼굴 부조를 걸어놓았다. 그러나 이런 해방도 잠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밀어낸 소련제 탱크 때문에 카프카의 자유는 다시 원점으로 복귀되었다. 카프카가 완전히 체코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벨벳혁명 이후부터였다.

 

경계인의 삶, 카프카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당시 유대인은 천민 신분이었으므로 신분 상승이 막혀 있었다. 때문에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가난했다. 헤르만은 자신의 첫아이의 이름을 유대식이 아닌 오스트리아식(독일식)으로 지었다. 당시 보헤미아 지방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이름이 프란츠 요제프였다. 차별받던 유대인 중 다수가 이런 성향을 보였다. 당시 유대인은 프라하의 게토 지역 내에 갇혀 살며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천민으로 살던 유대인 헤르만 카프카도 정육점을 운영하는 백정이었다.

카프카는 41년의 생애 중 35년은 오스트리아 시민으로서 노쇠한 합스부르크제국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산 35년 중 마지막 4년은 유럽이 1차 세계대전을 겪던 시기였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1차대전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다. 카프카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시민으로 산 것은 1918년부터 1924년가지 6년에 불과했다. 그 6년은 체코 현대사에서 짧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민지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유대계였다. 어떤 학자는 카프카를 이렇게 비유하곤 했다. "일제시대, 서울 변두리 중국집에서 태어나 총독부 관리로 일하며 밤에 일본어로 소설 몇 편을 쓴 사람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 세계적인 작가가 된 경우는 없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은 체코의 유대인처럼 박해를 당하진 않았다. 비 유럽인으로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 카프카는 경계선상의 벼랑 끝에 내몰린 극단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극단적이고 분열된 삶 속에 놓인 카프카에게 유일하게 놓인 비상구가 바로 글쓰기였다.

 

 

프라하에서 찾을 수 있는 카프카의 흔적들

1. 미누트하우스

구시가광장의 천문시계의 왼편에 특이한 건물이 서 있는데, 외벽에 르네상스 스타일인 스크라피티(scraffiti)장식이 있는 건물이 바로 미누트하우스다. 카프카는 미누트하우스에서 소년학교 시절과 김나지움 1학년에서 7학년가지의 시절을 보냈다.

 

2. 카프카의 생가

유대인 게토와 구시가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마이슬로바 Maiselova 거리 2번지, 카프카의 얼굴 부조가 붙은 건물) 카프카의 문학과 인생을 설명하는 용어 중 하나인 '경계인'이 마치 생가의 지리적 위치에서 나온 듯하다. 카프카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이 되지 못하고, 체코인이면서 체코인이 되지 못한 운명이었는데, 유대인 게토와 프라하의 중심인 구시가의 경계선에 위치한 그의 생가가 카프카의 운명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3. 골스킨스키 궁전 (현 국립미술관)

오른쪽의 붉은 지붕 건물이 국립미술관이다.

김나지움은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교육기관이다. 현재 골스킨스키 궁전은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골스 백작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왕립 김나지움으로 쓰였다. 왕립 김나지움은 프라하의 사율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왕립김나지움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필수 코스였다.

김나지움에서는 철저히 주입식교육이 이뤄졌다. 교사들은 권위적이었고 수시로 체벌을 가했으며 학생 개개인의 특성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과목의 절반은 고전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 수업이었다. 학생들은 시험 때마다 고전어를 달달 외웠지만 시험만 끝나면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카프카도 그런 학생 중 한명이었다.

카프카에게 김나지움 생활 8년은 끔찍했다.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던 어린 카프카는 김나지움에 열심히 다녀야 했다. 훗날 카프카는 메모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사람들은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 사람들은 가스를 잠가버려 나를 깜깜한 어둠 속에 남겨둠으로써 나의 특성을 억눌렀다. 그 이유로 내가 들은 말이라고는, 모두 자니까 너도 자야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부당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나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가정과 학교,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지만 이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저 책을 탐닉하며 스피노자, 괴테, 클라이스트, 톨스토이, 다윈, 니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이었다.

 

4. 카프카가 일하던 산업재해공단, 호텔 메르큐레

 카프카의 직업은 작가가 아니었다. 카프카는 보험회사에서 10개월 간 일하다가 산업재해보험공단에서 위험 정도에 따라 관할 구역 공장의 등급을 매기는 일을 했다. 오늘날 보험 계리사같은 것이다. 카프카는 이 일을 하면서 현장을 방문하고 노동자들을 마났다. 카프카는 머리가 비상한데다 성실하게 일해서 금방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1913년 과장, 1920년 국장, 1922년 이사로 승진한다. 카프카는 산업재해예방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보험공단에 다니며 일을 열심히 하는 14년 동안 가장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보험공단 시절 카프카의 일과는 이랬다.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카프카는 회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3시부터 7시까지 낮잠을 잤다. 그런 뒤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산책을 한 뒤 가족들과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밤 11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보험공단 빌딩은 지금 메르큐레 호텔의 건물로 쓰인다. 내가 묵었던 호텔의 바로 옆건물이었지만 가보진 못했다. 그 호텔 메르큐레가 그 호텔 메르큐레(?)인 줄,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기 때문이다.

 나 포지치 7번지에 있는 메르큐레 호텔 / 호텔 내부에 전시된 카프카의 사진 (Flickr)

 

5. 카프카의 기념품 가게

카프카의 흔적은 없지만 카프카의 책, 카프카의 티셔츠나 컵, 성냥 같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이다. 유대인 시나고그를 순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게인데 나는 이곳에서 카프카 성냥과 그림책을 샀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카프카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선물할 만한 것이 많으니 시나고그 근처에 가 있다면 한 번 들러 보는 것도 좋다.

 

 

참고문헌 :

김규진 <프라하, 매혹적인 유럽의 박물관>

조성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Posted by 물개꾸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