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2012 동유럽2012. 7. 15. 02:00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

백과사전에는 체코 민족음악의 창시자라고 나온다.

 

 

프라하의 봄의 의미와 스메타나

프라하의 봄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미국 영화감독 필립 카우프먼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토대로 만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프라하에서 매년 5월 12일에 시작돼 6월 초순까지 계속되는 음악 축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엔 '스메타나 축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프라하의 시민극장 스메타나 홀에서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6곡이 연주되고, 이 개막 연주회는 체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 체코 태생 음악가 중 국내에 더 잘 알려진 사람은 드보르작이지만, 체코 사람들은 프라하의 봄이 개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만큼 스메타나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스물 넷 스메타나가 문을 연 음악학교

스메타나는 18살이던 해 이런 일기를 썼다. "신의 은총과 신의 도움으로 나는 언젠가 기술에서는 리스트가, 작곡에서는 모차르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5년 후에 스메타나는 오랫동안 흠모하던 프란츠 리스트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 개인적인 친분은 스메타나가 리스트에 보낸 편지에 나타났다. 스메타나는 스물 네 살이던 해에 음악학교를 개설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돈이 없었다. 스메타나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리스트에게 음악학교를 여는 데 필요한 자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쓴 것이다. 리스트는 돈을 빌려주지는 않았지만 이후 스메타나의 작품이 출판되어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결국 스메타나는 자신의 학교를 열 수 있었고, 수 명의 제자를 두며 프라하가 빈에 못지 않은 음악의 중심이 되는 데에 힘을 쏟았다.이 음악학교는 구시가광장의 천문시계탑 맞은편 건물에 있다. 지금은 호텔로 쓰이고 있었다.

 

국립극장을 건설하려는 움직임

1848년은 파리에서 2월혁명이 일어난 해다. 왕정을 철폐하고 공화정을 이끌어낸 혁명의 불길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3월에는 빈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파리와 빈에서 한 달만에 연이어 일어난 혁명의 소식은 마침내 프라하에 도달했다. 보헤미안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밀어내려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후 왕가의 압제는 거세졌고, 프라하 시민들은 체코어 대신 독일어를 써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체코어로 된 오페라나 연극을 공연할 수 없었다. 음악가들은 외국으로 나갔다. 스메타나는 이후 보헤미아를 떠나 스웨덴에서 생활했다. 그 때가 1856년이었다.

1860년 들어 체코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뀌면서 체코에서 민족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행보다. 우리나라도 1910년 강제 점령 당시부터 10년 간은 무단 통치의 시기를 겪다가 1920년대부터 갑작스레 문화 통치로 바뀌었었다. 한글 및 민족 음악, 민족 문학의 숨통이 틔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프라하에서는 체코어 전용 국립극장을 짓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스메타나는 이 소식을 스웨덴에 있을 때 들었다. 스메타나는 유년 시절부터 배워온 독일어를 버리고 체코어를 쓰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그리고 억압된 프라하의 분위기를 피해 망명오다시피 한 스웨덴에서 잊고 살았던 민족의식이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1861년 5월 스메타나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프라하로 오자마자 스메타나는 음악학교를 새로 열었다. 합창단 지휘자, 일간지 음악 담당 기자, 예술가협회 음악 분야 책임자 등을 맡으며 스웨덴이 아닌 체코 음악계에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이런 대외적인 활동보다 의미 있는 것은 스메타나가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체코어 오페라

오페라가 처음 시작된 나라는 이탈리아다. 빈에서도 모차르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어 오페라만 있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는 이탈리안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빈에서 최초로 독일어로 된 오페라 곡을 쓴 작곡가였다. 19세기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민지였던 프라하에서는 독일어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만 있었다. 그러나 민족문화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체코 사람들은 체코어로 된 오페라와 연극을 보고싶어 했다. 체코어 전용 극장을 건립하려는 움직임도 이 때문이었다. 국민성금만으로 지어진 국립극장의 개관일은 1881년 6월 1일이었다. 프라하 시는 이 역사적인 개관일에 맞춰 오페라를 공모했다. 그리고 스메타나가 작곡한 <리부셰>가 당선되었다. <라부셰>는 보헤미안의 건국신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였다. 사실 스메타나는 <라부셰>를 1869년에 쓰기 시작해 1872년에 이미 완성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곡을 다 써놓고 9년 동안이나 공개하지 않았다. 그만큼 스메타나는 체코어 전용 국립극장의 개관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스메타나와 프라하 시민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 국립극장이 <리부셰>와 함게 개관되었지만, 두 달 만에 불에 타버렸다. 그러나 재건축에 필요한 자금이 6주 만에 모였고, 2년 뒤인 1883년에 다시 개관식을 가졌다. 이 때도 <리부셰>가 개관기념 오페라로 채택되었다. 국립극장의 설립 의의와 스메타나의 의지-보헤미안을 위한, 보헤미안에 의한 음악을 국립극장의 개관식에 올리고 싶은 의지-가 통하게 된 것이다.

프라하 국립극장 (Flickr)

 

지금은 국립극장이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모했다. 매일 오후 7-8시경 1만원 이내로 볼 수 있는 공연을 상영하며, 그날 공연 스케쥴은 아침에 확인 가능하다. 공연장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빈다. 물가가 싼 프라하에 사는 지역 주민들이 1만원 내외의 공연을 보는 것은 부담스럽지않을까 싶다. (우유 한 팩에 1천원 정도, 크루아상은 2-300원)

사실 국립극장뿐만 아니라 프라하 자체가 관광객을 위한 곳으로 변해 왔고, 또 변하고 있다. 펍이나 레스토랑, 카페는 골목골목마다 즐비하지만 정작 지역 주민을 위한 문구 가게나 저렴한 식당은 거의 없어 보였다. 스메타나는 보헤미안 민족을 위한 '민족 음악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그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는 덕분에 이제는 한 명의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스메타나 동상 (Flickr)

 

프라하의 스메타나 뮤지엄  (Flickr)

 

참고 문헌

조성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김규진 <프라하-매혹적인 유럽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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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개꾸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