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 내 돈2014. 6. 30. 23:59

예부터 채식을 하는 승려나 인도의 채식주의자들이 영양적으로 가장 의존하는 식품이 콩이었다.

고려 시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집』에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다.

나물국 오래 먹어 맛을 못 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우어 주네.
이 없는 이, 먹기 좋고
늙은 몸 양생에 더없이 알맞다.
물고기 순채는 남방 월나라 객을 생각나게 하고
양락(洋酪)은 북방 되놈을 생각나게 한다.
이 땅에는 이것이 좋다고 하니
하늘이 알맞게 먹여 준다.

조선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두부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서 중국과 일본에 그 기술을 모두 전해 주었다고 한다.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는 “서울 창의문 밖 사람이 두부를 잘 만들며 그 연하고 매끄러운 맛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는데 『아언각비(雅言覺非)』에 그 유래가 나온다.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언이라 생각하여 따로 ‘포’라 하였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園)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사 문서에 ‘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포(泡)란 물거품이라 음식 이름으로는 부적당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 때부터 산릉을 모시면 조포사를 두어 제수를 준비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름난 것이 연도사(衍度寺)와 봉선사(奉先寺)의 두부이다.

1434년 섣달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박신생(朴信生)이 세종대왕에게 중국 천자의 칙서를 전했다. 그 칙서에는 조선 임금이 일전에 보내 준 찬모들은 모두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음식을 만드는데 음식 중에서 특히 두부가 정미(精味)하다고 칭찬하였고, 다시 찬모 열 명을 뽑아서 특히 두부 만드는 솜씨를 익히게 한 다음 사신 오는 편에 함께 보내 달라고 하였다고 『세종실록』16년에 씌어 있다.

두부는 기원전 150년 전후 한나라의 유안(劉安)이 회남왕(淮南王)으로 있을 때 처음 만들었으며, 『만필술(萬畢術)』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두부의 발상지라는 중국의 안휘성(安徽省) 회남시(淮南市)에 유안의 무덤이 있고 그 인근에 두부 발상지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그래서 지금도 유안의 생일인 9월 말에 두부의 종주국임을 주장하며 두부제를 성대히 열고 있다고 한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전해졌다고 하는데 당시 병량 조달 책임자였던 오카베(岡部治郞(강부치랑)) 병위가 조선에서 배워 간 것이 시초라고 하는 설과 진주성 함락 때 경주성 장수인 박호인(朴好仁)이 포로로 붙잡혀 가서 일본 고치(高知(고지))에 살면서 퍼뜨린 것이 시초라는 설이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해 주었으나 지금은 일본의 두부 가공 기술이 더 뛰어나서 오히려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포장 두부나 장기 보관 두부 등 여러 제품을 배워 오고 있는 실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2, 초판 1998, 10쇄 2011,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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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개꾸엉